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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day, August 2, 2020

66세의 백선엽, 다부동 전투를 말하다 - 월간조선

sandratersandra.blogspot.com
지난 7월 10일 별세한 백선엽(白善燁‧1920~2020) 예비역 육군대장이 1985년 육군대학(2011년 합동군사대학교로 통합)에서 영관급 학생 장교들을 대상으로 강연한 녹음파일이다. 당시 백선엽 장군은 1960년 합참의장을 끝으로 군에서 예편한 후, 자유중국‧프랑스‧캐나다 대사, 교통부 장관, 충주비료 대표, 한국종합화학대표를 거쳐 한국후지쯔주식회사 연구위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백선엽 장군의 당시 연세는 66세. 군문을 나온 초로의 신사가 한국전쟁 기간 중 몸소 치른 전투 현장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술적 문제, 전략적 문제를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학생들에게 강의하는 내용이다. 특히 다부동 전투 부분에서 “내가 물러서면 나를 쏴 죽여라”라고 말하는 부분은 듣는이로 하여금 가슴이 뭉클하게 하는 대목이다.
이 녹음 파일은 백 장군의 4시간 강연 중 핵심적인 부분 46분 분량을 따로 떼어낸 것으로, 2002년 무렵 기자가 백선엽 장군을 취재하는 과정에서 입수한 것이다. 남정옥 전 군사편찬연구소 책임연구원은 “백선엽 장군의 6‧25 전쟁 관련 강연 내용 중 가장 젊을 때 육성증언으로 보인다”며 “기억이 생생할 때인 만큼,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고 본다”고 했다. 강연 첫 부분에 등장해 백 장군을 소개하는 사람은 김준봉 육군대학 총장(육군소장‧육사 12기)이다. 음성파일과 함께 강연 녹취록도 함께 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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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발언 : 김준봉 육군대학총장(육군 소장)
오늘 여러분이 한국전사 시간에 익히 들어서 잘 알고 있는 우리의 존경하는 선배님이신 백선엽 대장님을 오늘 오전 4시간 동안 모시게 된 것을 대단히 기쁘게 생각합니다. 백 대장님께서는 1939년 평양보통학교를 졸업하시고 1941년 만주군관학교를 졸업하시고, 49년부터 50년까지 보병 제5사단장, 50~51년 보병 제1사단장, 51~52년 제1군단장, 52~54년 참모총장, 그 기간 얼마 동안 당 대학 3대 총장으로 재임하신 바 있습니다.
54~57년 제1군사령관, 57~59년 참모총장, 두 번째 총장을 역임하셨습니다. 59~60년 합참의장 1960~69년 자유중국‧프랑스‧캐나다 대사, 69~71년 교통부 장관, 71~73년 충주비료 대표, 73~80년 한국종합화학대표, 현재 한국후지쯔주식회사 연구위원으로 재직 중에 계십니다.  우리나라 나이로 올해 66세이신데, 여러분이 보시는 바와 같이 아직 강건하시고 특히 후배를 위해 이 먼 길, 불순한 일기에도 이렇게 와 주신데 대해서 여러분과 더불어 대단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20대, 30대 젊으신 나이에 사단장급 이상 군단장, 그 다음에… 당시 군사령부는 현재의 1, 3군을 합친 전 전방을 담당하는 야전군 사령관이셨는데, 이를 모두 역임하시고, 그 젊은 나이에 3년 동안 한 번도 전장을 떠나본 적이 없이 전장마당에서만 만 3년을 보내셨습니다.  그러한 전쟁 중 야전군 사령관의 막강한 권한을 갖고 계셨음에도 여자문제나 금전문제나 기타 지휘통솔에 있어서 하나의 스캔달이 없으신 분이기도 합니다(좌중 웃음). 왜들 웃어요? (좌중 웃음) 보통 얘기하면, 그런 위치에 가면 인간인 이상 누구나 그렇게 되기가 쉬운 겁니다. 그런 면에서 여러분에게 많은 귀감이 되고 본받을 점이 있지 않을까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사실상 본인이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임관을 해서 소대장으로 군사령부에 신고를 하러 갔을 때에 군사령관님으로 계셨습니다(좌중 웃음). 지금부터 20~30년 전에는 육군대학뿐만 아니라 군의 간부들이 모이는 장소에서 선배님을 초빙해서 강의를 들으려 해도 선배님이 없던 군대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6.25 전쟁을 치르시고, 그 기간에 군단장 총장을 지내시던 선배님이 이렇게 후배를 위해서 오셔서 교육할 수 있는 이런 시대가 온 것만 해도 우리 군이 이만큼 성장하고 역사가 만들어져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대단히 귀중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백선엽 예비역 대장 강연
 
오늘 총장님으로부터 소개를 받은 백선엽이올시다. 오늘 총장님이 저보고 스캔들이 없다고 했는데 사실은 스캔들이 많습니다(좌중 웃음). 사람이 신이 아닌 이상,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실책도 있고, 또 실패도 있고, 또 경험이 없으면 역시 기지(旣知)에서 미지(未知)를 갈 때에는 역시 눈이 잘 보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경험을 합니다.
여러분이 앞으로 군인 생활을 하는데 있어서 나라에 좀 더 여타한 봉사를 위해 이 육군대학에서 연마를 하고 계십니다. 제가 앞으로 4시간에 걸쳐 여러분과 같이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일어났던 여러 가지 전술적 문제, 혹은 전략적 문제에 대해서 제가 아는 한도에서 여러분들과 같이 연구를 해나가고자 합니다.
그래서 시간이 오늘은… 총장님이 저에게 특별히 많은 시간을 주셔서… 앞으로 이때까지 제가 육군대학에 와서 변변치 못한 강의를 한 15년 동안 계속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있어서 오늘 제일 시간을 많이 배당을 받았기 때문에 여러분들 조금도 어깨에 힘을 주시지 마시고 편안한 자세로 여러분의 질문도 받고, 제가 또 최대한 아는 한도에서 여러분에게 해답을 해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편안한 자세로 들어주기 바랍니다.
첫 번에 여러분과 같이 오늘 우리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은 임진강 전투입니다. 지금도 국군 제1사단이 임진강 북쪽에서 방호임무를 하고 있습니다. 1950년 6월 25일 4시에 북괴가 전면적으로 삼팔선에 연해서 총공격을 해왔다는 것은 여러분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임진강 방호를 하는데 있어서는, 그 당시에는 삼팔선 서쪽에는 옹진반도가 있고, 청단(황해도 청단군)에서 연안(황해도 연안군), 개성, 그 다음에 고랑포, 동쪽에는 한국 7사단, 적성이라고 하는 데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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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당시 평양시 일각에서 백선엽 준장이 미 제1기갑사단장과 다음 작전을 짜고 있다. 사진=조선DB

임진강에서 우리가 사단 방호를 제대로 해본 것이 임진강 전투입니다. 여러분, 한국전사에서 아시다시피 임진강에서 처음으로 우리가 하천방어를 해요. 하천 방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도 학교에서 이론적인 것을 익히 잘 아시지만….

제가 이 1사단에 오게 된 것이 1949년에 광주에 5사단장으로 있다가 진주 서쪽의 지리산, 덕유산, 무등산…. 여기에 1948년에 여수에 있던 14연대가 반란을 하면서부터 국군 안에 숨어있던 공산분자들이 일제히 봉기를 기대하고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그 여파로써 지리산에 잠복을 하고, 밤에는 산에서 내려와 우리 양민을 학살하고 경찰을 습격하던 그것이 1949년에서 1950년 초기에 이르는 한국의 후방 상황입니다. 49년에서 지리산 일대를 소탕하다가 50년 5월에 제가 1사단장이 됐습니다.
그래서 1사단장으로 50년 5월에 가봤더니, 한국군 12연대가 개성에 주둔하고 있더라. 그중에 1개 대대가 연안에 배치되고 있더라. 그 다음에 13연대가 임진강 나루터가 있는 여기에서 1개 대대를 앞에다 놓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고 인천의 11연대가 인천에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만약에 자기가 임무를 맡았는데, 만약에 적이 전면 공세를 했을 때 어떻게 해야겠느냐. 그래서 시간은 없고 머리를 짜낸다고 한 것이 임진강에서 하천 방어를 하자. 그래서 12연대를… 당시 사단사령부가 지금 국방연구원이 있는 수색에 있었습니다. 11연대를 인천에서 수색으로 가지고 옵니다. 
 
그 다음에 포병은 1개 대대밖엔 없었고, 이것이 개성에 있기 때문에, 이것을 평소에는 수색에 주력을 두고 13연대의 강 남쪽에 가지고 왔습니다. 그러면 13연대를… 지금 파평산 북쪽인데, 지금도 지형이 꼭 같아요. 지금 우리가 그 당시에 방호 진지를 구축한 그 자리에 지금도 방호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을 몇 해 전에 가보고는 혼자 웃었는데요. 지형은 변경이 없는데, 40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장소에 진지를 구축한다고 하는 것을 볼 때 ‘사람의 인지라는 것이 그다지 발전이 없지 않느냐’하는 것을 내가 통감을 했어요.
그래서 13연대를 파평산 북쪽에 배치하고, 11연대를 지금 자유의 다리가 있는 앞쪽에다 배치하기 위해서 5월 하순서부터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6·25 때 만약에 이 진지구축을 안 했더라면,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됐을 때까지도 우리는 이 제2방어선에서 최후까지 있었습니다. 이때 서울이… 6월 27일 한강 인도교가 폭파될 때에 우리는 28일까지 제2방어선에 있을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우리가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것이 됐다, 이겁니다,
그 다음에 6월 25일 이 철교를…, 여기 자유의 다리를 폭파를 하려고 했는데, 그 공병대대장이 ‘폭파를 해도 좋습니까’라고 해서 25일 오전 중에 보고를 받았어요. 12연대가 아직도 개성에서 주력이 강을 건너기를 오후 3~4시까지 기다렸지만, 겨우 12연대 선두가 오기 시작했습니다. 적이 이것을(12연대) 따라와서 폭파하려고 했더니, 전기장치가 고장이 나서 끝끝내 이것을 폭파를 못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중요한 교량을 폭파할 때는 앞으로는 면밀히 이것을 사전검토, 매 시간 매 시간마다 검토해 나가야 하지 않겠느냐, 하는 것을 오늘날에 있어서도 절실히 느끼는 것입니다.
또 그 다음, 평소에 공사를 해두지 않으면, 평소에 지형정찰이든지, 모든 도로정찰, 여러 가지 장애물 계획을 평소에 해두지 않으면, 일단 유사시가 되게 되면 급한 상황에서는 그것이 되지 않더라는 것을 우리가 느끼는 겁니다.
결국은 우리가 제2방어선에서 28일 오전 중에 다시 문산을 반격하려고 했습니다. 한국군 7사단, 2사단, 3사단, 5사단의 증원 병력들이 의정부-미아리에서 반격을 하려고 하지만, 결국 전차 기습을 받은 그런 여파로써 끝끝내 서울을 우리가 유지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28일은 때마침 미군 B-26이 봉일천 일대를 폭격해서 “왜 우군이 우리를 갖다가 이렇게 폭격을 하느냐”고 했더니 그 당시에는 공지(空地) 연락하는 방법이 없었어요. 미군 참전이… 겨우 첫 번에 미군 공군이 여기에 도달했는데, ‘한강 이북에는 한국군이 없다’하는 통보를 받았기 때문에 우리를 폭격했어요.
그래서 우리가… 봉일천국민학교 서쪽에 다리가 지금도 있는데, 거기에 각 연대장, 특과 대대장들을 모아가지고 “금후(今後) 어떻게 해야겠느냐”고 했어요. 그래서 “서울은 어젯밤에 끝났다, 그러나 우리가 이 앞으로의 후도를 우리가 하기 위해서는, 결국 우리가 한강을 건너서 한강 남쪽으로 가야 되겠다”고 해서 각 연대장들하고 이제 상의를 합니다.
결론이, 미군이 우리를 증원‧응원을 해주는 데 있어서 아직 지상군이 올지는 우리가 모른다. 그래서 제1차 목표를 시흥으로 잡자. 그 다음에 미군이 앞으로 우리를 증원하는 것이 시간이 걸리게 되면, 우리는 지리산으로 가자. 이렇게 해서 두 연대장을 한강에 정찰을 보냅니다.
한 연대장은 최영희 대령이고, 한 분은 최경록 대령. 두 분을 한강으로 보냈습니다. 그랬더니 한 분은 “행주나루터가 좋다”고 해요. 지금도 행주나루터가 있는데, 전통적으로 도섭장이 과거에도 있었어요. 그 다음에는 이산포라고 하는 데가 있습니다. 두 도하 지점을 보내봤더니, 나중에 이산포에 갔더니, 이산포에는 하폭(河幅)이 너무 넓고, 김포에 벌써 적이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이산포는 우리가 포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행주나루터를 거쳐서 시흥으로 우리가 탈출하는 그러한 전투를 했어요. 그중에 적의 전차를 과연… 초기에 우리 한국전쟁의 제일 중요한 부분이… 우리는 전차가 없고, 전차에 대항하는 무기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곤란을 당했지만. 그러나 우리가 제2방어선에서 문산 입구에 출현한 적을 아군의 포병하고, 그 당시에는 대전차포 57mm짜리가 있었는데, 이 포병만 가지고도 어느 시기는 적의 전차 부대를 저지한 일이 있습니다.
시초에 이러한 기습만 받지 않았으면 우리가 어느 정도 초전에 능히 대항할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을 우리가 알아요. 결국은 이 전투에 있어서는 우리가 적의 완전한 기습을 받았다, 그리하고 일요일이었다, 그 다음에 아침 4시에 총공격을 해왔다,
그전에 공산당은 자기네 총공격을 하기 전에는 반드시 정치적인 제스처를 씁니다. 그것은 사변이 나기 2개월 전에, 이북의 민족지도자인 조만식 선생과 그 다음에 이남에 있는 공산당 두목하고 교환하자고 하는 제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네들이 흉계를 꾸밀 때에는 반드시 무슨 흉계를 꾸미더라’는 겁니다.
중국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양두구육(羊頭狗肉)이라는 말. 고깃간에 고기 파는 사람이 있으면, 간판은 양 머리를 걸어놓지만, 뒤로서는 개고기를 판다 이겁니다. 그래서 공산당들이 하는 수법은, 이 사람네들의 정책은 일관성 있어서… ‘세계를 적화하고 한반도를 적화한다’고 하는 것은 일사불란하고, 그 사람들의 계획은 노체인지입니다.

그러나 자기네 필요에 따라서 테이블 위에 교섭도 하고 뭐도 하기 때문에 이 사람네들의 본질이 어떻다고 하는 것을 우리는 잘 알아야 되겠다. 우리를 유단시켜 가지고는 그 다음에 자기네 흉계를 일거에 자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는 이 본질을 우리는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또 우리가 임진강에서 체험한 것은, 평소에 준비 없는 자는 반드시 전장터에서 이것을 이겨낼 도리가 없다. 우리는 미리미리 예견해 가지고 여기에 대한 대응하고, 여기에 대한 대책을 강구해 나가야겠다는 것을 우리는 임진강 전투에서 교훈을 얻은 것입니다.
그러면 초전에 삼팔선에서 1사단, 7사단, 5사단, 3사단, 2사단…, 그다음에 춘천 정면에 6사단, 동해안에 8사단, 당시 편제로써는 옹진에 17연대. 그 당시에는 삼팔선에 연한 사단은 포병이 1개 대대씩 있었습니다. M2인가 뭐인가, 지금 105mm 보면 뭐라고 하나. 지금 현재 105mm 유탄포 보고 뭐라고 합니까. (학생장교, M1) M1? 이건 M2. 이건 사정(射程)이 좀 작아요. 그런데, 6사단은 그 당시에 미리 준비가 있어서 춘천, 그 다음에 홍천에서 어느 정도 저지가 되었어요. 8사단은 그 당시 2개 연대의 사단인데, 동해안에서 어느 정도 저항을 해가지고 대관령으로 해가지고 남쪽으로 빠지기 시작했어요.
이 사단들은 그 당시 광산에 가서… 이 강원도에는 광산이 많았는데, 그 당시에 광산에 외국서 들여온 트럭들이 상당한 숫자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 양개 사단에서는 그걸 일찍이 가서 징발을 했어요. 그래서 6사단하고 8사단은 초기에 기동력이 굉장히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들은 한강 이북에서 고전을 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오랜 행군을 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수 이북에서 우리는 중장비를 다 잃어버리고, 일부 공용화기하고 소화기만 가지고 이 한강을 넘었어요. 시초에 우리가 한강에서 사흘 내지 5일 동안 시흥전투사령부가 버텼기 때문에 미군들이 한국 참전에 도움을 줬다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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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총사령관과 함께 1951년 3월 서울을 탈환한 국군 1사단 사령부로 도쿄 유엔군 맥아더 총사령관이 예고 없이 방문해 백선엽 사단장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사진=조선DB

그 이후에 오산에서의 미군 스미스 대대의 선전‧건투가 있었고, 딘 장군의 대전 방어전이 있었고요. 그래서 한반도에 있어서 미군이 될 수 있는대로 먼 데서 북괴군을 저지하겠다는 것이 당시 미 8군의 의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부산교두보까지 후퇴가 되는데요. 7월 중순에서 8월, 그 다음에 9월 초. 지금 왜관에서 동쪽은 국군이고, 왜관에서 남쪽 90km, 50km인데, 이 서쪽은 낙동강을 의탁을 해서 이것이 미군 지역이고, 이쪽이 한국군 지역입니다. 그래서 부산교두보에 있어서 두 개의 큰, 몇 개의 전투를 한 중에서 여러분에게 제가 소개를 하고자 하는 것은 이 다부동 전투입니다.
한국전쟁 중에서 미군하고 한국군이 처음 라인오브디펜스(Line of Defense‧방어선)를 해본 것이 303고지입니다. 이 303고지에서 한국군하고 미군 제1기갑사단의 병력이 처음 접촉을 합니다. 그런데 당시에 8군사령부로서는 ‘한국군하고 미군하고 전혀 모르니 사단장이 좀 나가서 보라’는 겁니다. 그래서 나도 “여기까지 갈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생각을 했었는데, 가보니 어떤 중령이 있어요. 그 중령 이름이 존슨(제8기병연대 제2대대장 해럴즈 존슨 중령‧육군참모총장 역임)이라는 사람이었어요.
그래서 자기가 존슨이라면서 대대장인데…, 그래서 우리 국군 1개 소대를 좌측에 보내고, 그 우측에 미군 1개 소대를 교환을 했어요. 그래서 그 중령 만난 사람의 얘기가, 배치가 끝나고 제일 걱정이 서로 말을 모르는 거예요.
미군은 한국말 모르고, 한국 사람은 겨우 알아야 “오케이, 오케이”하는 것이나 알고 다른 건 모른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중령이 “이거 이래가지고 되겠냐”고 하는 거예요. 나도 뭐 별 뾰족한 수는 없고 해서 “걱정 말라, 사람이라는 것은 살 게 마련이다, 급하면 통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이 중령보고 “좌우간 하룻밤만 자면은 저 사람들이 친구가 될 거다”고 해서 내깔려 뒀습니다. 그런데 이 중령이 자기 신상타령을 해요.
이 중령이 뭐라 하는고 하니, 자기는 제2차대전 때 필리핀 바탄의 데스마치(Death of March), ‘죽음의 행진’에 자기는 참가를 했다고 해요. 그래서 제2차대전 때 일본 치하의 인천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8·15 해방 때 풀려나왔다 이겁니다. 그래서 이 중령이 나중에는 대령으로 진급을 하고, 나중에 이 분이 미국에서 육군참모총장이 되리라고 나는 생각을 못 했는데, 이 분이 월남 전쟁 때 미 육군참모총장을 지냈어요. 그런데 그 당시에 옛날 일제 치하의 인천의 모습을 이 분이 나한테 설명을 하면서 한국 사람이 자기를 도와준 이야기를 이렇게 했습니다. 이건 여담이고.
한미 양개 소대가 손짓발짓하면서 그 이튿날 제가 전화를 받아보니 두 소대장이 아주 친구가 됐어요. 그래서 레이션도 나눠 먹고 밥도 좀 주고 해서… 끝끝내 아주 잘 돼서 이것이 한국 군대하고 미국 군대가 선(線)방어에서 처음 접촉한 것이 303고지로서, 왜관 동쪽에 있습니다.
그런데 다부동에서 우리가 왜 격전을 일으켰는가 하면, 부산교두보에서 북괴가 전라도 쪽으로… 남쪽에는 마산 서쪽에 진동리에 미군 25사단, 미군 2사단, 24사단, 제1기갑사단이 배치됐는데…. 낙동강의 하폭이 굉장히 큽니다.
평소에 지형정찰이라고 하는 것이 상당히 중요한데, 하폭이 크고, 미군의 화력이 크니, 이것(북괴군)이 어디로 돌기 시작했는가 하게 되면, 한국군 정면에, 비교적 낙동강선에 도섭하기 쉬운 낙동리 근처에 돌기 시작해가지고, 이것이 3개 내지 4개 사단이 우리 한국군 1군단 정면에 들러붙었다 이겁니다.
그래서 보통 같으면 상당히 격전이 되는데, 이것이 2주일 동안 우리가 격전을 하는데, 시초에 방어를 하다 보니 보통 그 압력이 심하지 않아서… 그 다음에는 대구가 위험하기 때문에 8군이 미군 27연대를 의성, 상주 쪽으로 내려오는 이 축선에 대해 증원했습니다. 그 다음에 미군 23연대를 또 증원했습니다.

이 두 연대장이 나중에 다 대장이 됩니다. 하나는 존 마이켈리스 중령이고, 하나는 폴 프리먼이라고 하는 대령입니다. 마이켈리스라고 하는 사람이 나중에 유엔군 사령관도 하지만, 이 한국 전장의 기동 타격부대로서 아주 큰 역할을 나중에 합니다.
그 다음에 23연대는 연대장은 폴 프리먼이라고, 나중에 지평리 전투에서 중공군 4개 사단을 무찌르는 역할을 한 분입니다. 실제 이 연대장은 나한테 와서 뭐라고 하니, “자기 미션은 이 도로 축선에서 500야드 우측”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내가 “그럼 넌 포병은 얼마나 있느냐”고 했더니, 자기는 “105mm 1개 대대, 155mm 1개 중대, 나는 탄약에 제약이 없고, 전차가 1개 중대다”고 해요.

그래서 내가 “공격을 하자”고 그랬어요. “why not do you attack?”이라고 했더니, 이 사람은 “그건 안 된다, 자기 명령이 그렇다”고 해요. 그래서 이 분이 여기에서 볼링앨리(Bowling Alley)라고, 볼링이라고 하면 적이 전차와 포병이 아주 필사적으로 달라붙었는데, 그것을 도로상에서 적의 보전포 부대(보병과 포병, 기갑부대)를 여기에서 섬멸했어요. 하루는 이분이 나한테 전화를 걸어와서 “여기 동명국민학교라고 하는데, 내 좌측에 있는 한국군 부대가 ‘without order’, 명령 없이 후퇴해서 지금 도망 온다”는 거야.

그래서 야단이 났지. “그럴 이치가 없는데 어떻게 됐느냐”고 했더니 “그럼 나도 지금 좌측이 비었기 때문에 후퇴해야 되겠다”고 해요. “여하튼 내가 가서 볼 테니 잠깐만 좀 기다리라”고 해서 다부동 고지에 뛰어가 봤습니다.  그랬더니 11연대 2대대가 완전히 총을 거꾸로 메고 옵니다. 적에 분패(僨敗)가 되면 또 좌측이 무너지고, 그 다음 미군 주도로가 무너지고… 그럼 이거 큰일이 났다. 그래서 1개 대대 남은 부대가 총을 거꾸로 메고 오기 때문에 “현장에 앉으라”고 그랬습니다. “앉으라”고 했더니 이 사람들이 앉았어요. 그래서 제가 거기에서, 적은 지금 따라오고….

그래서 이 분네들을 보고, “지금 우리는 갈 길이 없다, 우리가 이제 여기에서 패망을 하게 되면 그 다음에는 우리는 바다밖에는 갈 데가 없는데, 이거 어떻게 하느냐. 이건 죽느냐 사느냐, 우리는 여기에서 저항을 안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단장인 내가 선두에 설 테니 내가 만약에 후퇴하면 너희가 나를 쏴 죽여라. 여하튼 우리는 여기에서 지켜야 되겠다”고 했어요. 들어봤더니, 그 사람들이 산상에서 이틀을 굶었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여하튼 배가 고픈 것이 문제가 아니니, 나를 따라오라”고 했어요. 여러 사람들에게서 “알았느냐”고 했더니 “알았습니다”고 해요. 이제 다시 일떠서서 그 후퇴하는 길을 빠꾸해 가지고 그 산을 내가 선두에 나서서 공격을 시작했어요.

한 40분 동안 올라갔더니 적이 새로운 증원부대인 줄 알고 멈칫했어요. 다시 공격을 해서 한 시간 반 후에 그 산을 다시 회복을 했습니다. 그러자 마이켈리스라고 하는 연대장이 “아! 이거 세상에 저런 군대가 있느냐, 아까는 총을 거꾸로 메고 오더니, 이제는 또 총을 적에게 해 가지고는 다시 또 (탈환)하니 이게 신병이지, 뭐냐”고 감탄을 해요. 그래서 “후퇴하겠느냐”고 하니 “후퇴를 안 한다”고 해요. 그래서 이 지대를 우리가 막은 일이 있습니다.

또 조금 얼마 있다가 사단 CP(지휘소)를 저놈이 습격해 왔습니다. 저놈들이 2개 중대 병력을 가지고 밤 12시경에 동명국민학교를 습격해 왔어요. 보통 그 당시에 사단 CP가 습격이 되게 되면 도망가는 것이 보통이에요. 그런데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또 일이 잘될 때는 또 좋게 되는 방법이 있어요.

무엇인가 하면, 그날 오후 다섯 시경에 김모 소령(김순기 소령)이 지휘하는 10연대 2대대가 하양(경북 경산)에서 응원을 왔어요. 작전참모(문형태 전 국방부장관)가 “이 부대를 지금 배치를 할까요”라고 해서 조금 생각해봤어요. “밥을 먹었느냐”고 물어봤더니, “아직 밥 못 먹었다”고 해요. “그러면 밤에 배치를 하게 되면 밤에 지형도 모르는데 그곳에 가서 분산될 가능성이 있으니 오늘은 국이나 잘 해서 밥을 먹이고 내일 아침 4시경에 산으로 배치하라”고 했어요. 그날 0시에 적이 습격이 오기 때문에, 내가 1개 대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 대대장을 불러서 돌격을 시켜서 우리가 사단사령부를 잘 지킨 일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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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 1사단이 사령부 전진광장에 설치 예정인 백선엽 장군 공적 기념석. 백 장군 기념석을 중심으로 다부동 전투, 평양 선봉입성 부대 표창 등이 주변에 배치됐다. 사진=조선DB

그래서 그날 밤에 이것이 있고…, 그 이튿날 아침에 로튼 콜린스라고 하는 미국 육군참모총장이 사단사령부에 방문을 왔어요. 그래서 만약에 우리가 그날 저녁에 사단사령부가 도망이라도 갔더라면 창피 단단히 볼 뻔했는데, 아주 창피를 면한 일이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 시내에 가더라도, 자기 호주머니에 몇 만 원 있어야 마음이 든든하지, 기백원 갖고 가서 튀김 백원 돈으로 세고 밥 사 먹다가는 배가 고픈 거나 마찬가지로서, 역시 언제나 다소의 예비 병력을 (배치해 두어야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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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03, 2020 at 09:12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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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세의 백선엽, 다부동 전투를 말하다 - 월간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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