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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dnesday, July 29, 2020

이이(李珥)와 최익현(崔益鉉), 죽음을 말하다 - 전북도민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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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장원공(九度壯元公),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천재성을 대변하는 수식어다. 하지만 만일 이것만이 전부라면 만 48세에 세상을 떠난 그가 살아서는 물론 지금까지 한국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동력을 설명하기 어렵다. 율곡은 이원수(李元秀)와 신사임당(申師任堂)이 낳은 7자녀 중 다섯째다. 그에겐 두 명의 형과 두 명의 누나 그리고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다. 후일 그는 관직에 나가는 것을 두고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자문을 구하는데 벼슬에 나간 중요한 이유가 가족들 생계 때문이었다.

 그가 책임져야 할 사람이 거의 100여명에 달했는데 죽은 형의 가족까지 함께 생활해야 했기 때문이다. 율곡은 대학자이자 경세가인 동시에 당시로서는 이색적인 궤적을 보여주기도 한다.

  6세까지 강릉 외가에서 자란 율곡은 외가에 대한 자부심이 강했다. 율곡이 가장 존경한 인물이 외조부인 신명화(申命和)라면 지극한 공경과 사랑의 대상은 외조모였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존경과 사랑에서도 차이로 나타난다. 훗날 율곡이 두고두고 사대부 사회에서 비난 받는 빌미가 되는 출가(出家)의 계기도 어머니 신사임당의 죽음이었기 때문이다. 어린 율곡의 학문적 기초를 만들어준 것도 어머니였다.

 비록 짧지만 출가한 기간의 율곡 모습도 빛나는 것이었다. 당시 불교계에서는 그를 생불(生佛)이라 이를 정도였다. 하지만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이것은 사대부로서 용납이 되지 않았다.

  금강산에서 돌아온 율곡이 성균관에 들어오자 거의 모든 학생들이 그를 외면했던 것도 그래서다. 이때 율곡을 변호해준 인물이 심통원(沈通源)이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럼에도 율곡이 후일 심통원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는 것이다. 지도자에게 공(公)과 사(私)가 가지는 의미를 생각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율곡에겐 두 아들이 있었지만 모두 서자(庶子)였다. 여기서도 그는 여느 사대부와는 다른 선택을 한다. 양자를 들이는 대신 서자에게 자신의 후계를 맡긴 것이다.

  이제 율곡의 마지막 시간으로 가보자. 병조판서로 있을 때부터 과로로 병석에 눕게 된다.

 날로 악화된 시점에 서익(徐益)이 율곡을 찾아온다. 선조(宣祖)가 순무어사(巡撫御史)로 관북(關北)에 나가는 서익에게 율곡을 찾아가 변방에 관한 일을 묻게 한 것이다. 임진왜란 직전인 당시 조선의 상황은 남북 국경 모두가 매우 불안한 상태였다. 율곡의 자제들은 병이 악화될 것을 우려해 접응하지 말도록 청한다. 이때 율곡은 이렇게 말한다. “나의 이 몸은 다만 나라를 위할 뿐이다. 설령 이 일로 인하여 병이 더 심해져도 이 역시 운명이다.”

  율곡은 병든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서익에게 육조(六條)의 방략(方略)을 불러주었는데 이를 다 받아쓰자 혼절한다. 결국 율곡은 그 다음 날 삶을 마감한다.

  여기 또 한 사람이 있다.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이다.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그를 ‘만고에 얻기 어려운 고금 제일의 우리 선생’이라고 칭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그가 죽었을 때 이토 히로부미도 그를 추모했다는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생전의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조선군 10만은 두렵지 않으나, 오직 최익현 한 사람이 두렵다.”

  지도자로서 면암은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수구적 면모를 보이지만 제국주의적 침탈의 본질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비판은 더 있다. 동학농민군이나 독립협회에 대한 부정적 시각, 일제 침략으로부터 국권을 지키려는 우국충정은 갖고 있었으나 투쟁의 동력과 미래의 비전을 구체화시키지 못한 한계를 노출했다는 시각이 그렇다.

  일본군 포로로 대마도에 끌려가 순국한 면암의 시신이 부산에 도착하던 상황을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대부로부터 길거리에서 뛰어노는 어린이와 달리는 군졸에 이르기까지 모두 눈물을 흘리며 서로 조상하되, ‘면암이 죽었구나.’ 하였다. 나라가 생긴 이래 죽어서 슬퍼함이 이같이 성황을 이룬 적은 없었다.”

  율곡과 면암은 지도자의 죽음이 곧 공동체의 위대한 유산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장상록 <예산군농업기술센터 농촌지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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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ly 29, 2020 at 04:46P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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