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록하는 여자들이 읽은 『당신의 말을 내가 들었다』
기록하는 여자들의 독서 모임에서 이 책을 읽자고 한 이유는 하나였다. 여성 (기록) 작가가 인터뷰에 관해 쓴 국내서가 없었다. 지금껏 여자의 말은 별 가치를 지니지 못했다. 의사는 여자의 말을 믿지 않았고(미야 뒤센베리), 여자들은 자꾸 같은 질문만 받는다(리베카 솔닛). 그래서 여자가 삶에 관한 진실을 말한다면 이 세상은 터져버릴 거라고 했다(뮤리엘 루카이져).
세상을 터트리고 싶은 여자들은 다른 여자의 목소리를 찾아다녔다. 그러나 여자의 기록물도 가치 없게 취급받긴 마찬가지였다. 여자들 이야기로만 이뤄진 책은 낼 수 없다고 출판사로부터 답변을 받은 여성 저자들을 나는 알고 있다. 불과 5년 전 일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출판사들은 20-30대 여성 독자들을 위한 책을 서둘러 내고 있다. 페미니즘 리부트가 도래한 것이다. 여자들의 기록도 덩달아 관심에 올랐다. 『당신의 말을 내가 들었다』(안미선 저, 낮은산, 2020)는 그 길목에서 만난 책이다.
책의 저자는 나보다 더 오랜 시간 사람을 만나고 기록을 해온 이다. 그리고 나는 한두 해전부터 인터뷰를 하고 기록 글을 쓰기 시작한 사람들과 르포 읽기 모임을 꾸렸고, 그곳에서 이 책을 읽었다. 자기 삶이건 타인의 인생이건 무언가를 기록하고자 하는 여성들이었다. 이들과 책에 관해 나눈 이야기를 전해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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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들었다
당신의 말을 내가 들었다. 이것은 인터뷰에 관한 책이다. 책은 ‘묻는’ 행위가 아니라 ‘듣는’ 행위를 제목으로 하였다. 하지만 사람들은 기록 일에 관해 듣기보다는 묻는 일을 궁리한다. 요즘 들어 자신과 다른 여자에 대해 기록하려는 여자들의 열망은 커졌고, 나 또한 여느 때보다 기록하는 일에 관한 질문을 자주 받았다. 어떻게 기록해야 하나? 아니, 사람들은 이렇게 묻지 않는다.
“어떻게 물어야 답을 얻을 수 있을까요?”
이 질문이 올 때마다 도리어 나는 묻고 싶어졌다.
“왜 당신은 묻는 사람인가요?”
누가 그에게 물을 자격을 주었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공적인 자리였기에 그리 되묻지 못하고 ‘묻지 않기 위해 준비하는 일’에 대해 말했다.
“때로는 질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문하지 않기 위해 준비했다.”(책 94쪽)
책은 말한다. “사람들이 저지르기 쉬운 잘못은 묻는 사람이 질문할 특권을 가지고 있다고 여기는”데 있다고. “질문을 잇달아 쏟아내고 정보로서 그 답만 듣기를 원”하는 태도를 책 속 문장으로 읽을 때는 굉장히 무례해 보이지만, 이런 일은 실제 인터뷰 자리에서 빈번하게 일어난다.
세상은 여자들에게 늘 같은 질문을 한다고 했다. 기록자도 세상을 사는 존재라, 집중과 마음을 놓치는 순간 세상과 같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질문은 찰나지만, 기억은 오래 남는다. 흉터는 더 오래 남는다.
기록자는 ‘저지르기 쉬운 잘못’을 경계하면서도 매번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다. 그래서 나날이 자신의 한계를 느끼는 사람. 묻는 자로서 자신을 상정한다면, 그 역할은 어렵고도 혼란스럽고 무겁다. 이날 책 모임에 참석한 사람은 여섯. 한 사람만 빼고 모두 눈물을 보였다. 한낮에 여자들이 카페에 모여 울다가 웃다가 했다. 그러다 서로가 민망해지면 농담을 던졌다. 책이 슬펐기 때문은 아니었다. 기록이라는 노동이 버거울 때가 있어서다.
우리는 어긋나게 앉아 있다
“우리는 매번 어긋나게 앉아 있다. 말하는 이는 상대를 보고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듣는 이는 둘 사이에 놓인 차이를 목격한다.”(111쪽)
a는 언제 울었나. 그는 책에서 <어긋남> 장을 집어 들었다.
“우리는 매번 어긋나게 앉아 있다.”
a와 어긋나게 앉은 사람은 a보다 오십 살은 더 살았을 인물이다. a는 그를 ‘할머니’라 불렀다. 한국 현대사 질곡 속에서 존재하는 인물이었고, 그 질곡 속에서 살아남은 수많은 사람처럼 그이도 이름 석 자를 또렷이 남기지 못했다.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인 그의 사건을 다룬 기록은 있었으나, 그는 자신만의 기록을 요구했다. 그래서 a는 광주 ‘할머니’의 집 문을 두드렸다.
그러나 a는 질문할 수 없었다고 한다. 정확히는, a가 준비해간 질문이 아무 소용 없어졌다.
“질문을 하면 할수록 말이 더 없어지게 되고, 무엇을 질문으로 해야 할지 알 수 없게 되는? 그 사람의 삶과 나의 삶이 너무 다르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종국에는 질문하는 사람이 질문을 던질 수 없게 되는 거 같아요.”
책은 이리 말했다. “아무리 한 자리에서 이야기한다고 해도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차이는 두 사람 사이에 뚜렷한 선을 긋는다”(106쪽) 세대와 경험 그리고 고통, ‘할머니’의 모든 것은 a가 가닿지 못하는 곳에 있었다.
몸을 마주하고 한 공간에 머무르다
“할머니가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할머니의 태도나 말의 수위 조절을 통해, 할머니가 ‘너는 이해 못 할 거다’ 하면서 다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그건 a를 조바심 나게 했을까? 아니면 외롭게 했을까? 하지만 과연 인터뷰이와 인터뷰어는 마주 앉을 수 있는 존재일까를 의문한다. 시대사로부터 할큄을 당한 인물을 만날 때만 겪는 문제가 아니다. 한 중년 여성은 내게 말했다. 인터뷰 자리는 아니었다. 이야기 도중 그이는 할 말이 있지만 하진 않는다는 뉘앙스를 보이며 이런 말을 했다.
“우리는 평등하지 않으니까요.”
그때의 평등이란, 대단한 권력 차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자녀가 둘 있는 기혼 여성이었고, 나는 혼자였다. 서로의 처지가 다르니 당신에게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단정이었다. 일상의 차이는 높다란 벽을 설치하고 ‘당신이 무엇을 알겠어요?’라는 눈길을 불러온다. 그 눈길을 받아내는 것이 인터뷰 작업이다. 하지만 그곳에는 위계만 있지 않다. 관계가 있다.
우리 모두는 다르다. 그 다름을 때로는 숨기려 하고, 패싱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 그러다가 두 사람이 마주 앉으면 그제야 차이가 도드라진다. “직접 대면했기 때문에 그 차이는 더욱 강렬하게 인식된다.” 관계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 되어 마주 본다. 불평등한 사회에서 불평등한 관계 속에 놓여 있지만 우리는 평등한 언어를 꿈꾸기 때문에 만나서 말한다.”(112쪽)
a는 ‘할머니’와의 관계에서 어떤 평등을 만들어 나갔을까. 그것이 성공했던 것 같진 않다. 기록자가 애쓰나 이뤄지진 않는 일이다. 대신 a는 이런 말을 했다.
“이건 할머니 이야기라서, 제 이야기를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점점 할머니가 좋아지다 보니까. 할머니에게 내 고민도 말하게 되고, 그러면서 글에 내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어진 거 같아요.”
‘할머니’를 너무나 좋아하지만, 다가갈 수 없는, 어긋날 수밖에 없는 자기 이야기를 쓸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할머니를 너무 좋아해서 자꾸 어긋났나 봐요.”
a가 위안받았다는 책의 구절을 가져와 본다.“고백하자면, 차이가 커서 도저히 할 수 없을 것 같던 인터뷰를 해냈을 때 무엇보다 나의 시선과 생각이 가장 크게 변해 있었다.”(113쪽)
a의 바람은 ‘할머니’가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주는 데 있지 않을 테다. 자신이 할머니의 말을 올곧이 이해할 수 있게, 할머니가 마주 앉아 이야기해줄 수 있게 그 자신이 변하는 것을 바랐을지도.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글에 담는다.
평등은 쉽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나, 사람이 만나면 무언가가 작동하고야 만다. 그것은 “두 사람이 몸을 마주하고 한 공간에 머무”르기에 일어나는 일이다. 그 순간을 기대하며 인터뷰 자리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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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이제 나는 인정했다. 내 말이 당신의 말에서 나왔다는 것을. 온전히 나만의 할 말이 있었던 게 아니라. 당신의 말을 만나 비로소 하고 싶은 말이 생겨났다는 것을.” <프롤로그> 7쪽
두 사람이 한 공간에 머무르는 곳에서는 작동이 일어난다. 그런데 그 작동을 만들어 내기까지 서로의 욕망과 바람이 교차한다. 동시에 자신의 욕망을 누르고 상대의 말을 듣기 위해, 상대에게 말해주기 위해 애를 쓴다.
기록자는 인터뷰에 응해준 이를 좋아할 가능성이 크다. 서너 시간을 꼬박 그의 목소리에 집중하고 돌아와, 홀로 다시 그보다 두세 배 긴 시간을 거쳐 인터뷰이의 말을 듣는다. 그의 음성에 둘러싸여 몇 시간을 보내고 나면 마음이 몽글몽글해지는데, 이는 인터뷰이의 품성이나 서사의 감동 때문은 아니다. 그이가 인터뷰 내내 나에게 어떤 말을 해주기 위해, 자신을 설명하거나 보여주기 위해 애썼다는 사실이 느껴지면서 영문 모를 고마움이 올라오는 게다.
그래서 나는 모임에서 b가 한 말이 좋았다.
“말을 해주는 사람도, 그걸 받아 적는 사람도, 두 사람 다 그 자리에서 굉장히 애를 쓰는 거니까요.”
b는 발달장애인을 지원하는 노동을 했다. 일을 시작할 때만 해도, 자신은 젊고 글을 다룰지 아는 사람이라 지원 대상자를 기록해볼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일은 고되고, ‘멘탈’은 언제든 ‘나갈’ 준비를 갖췄다. 돈 버는 일은 그랬다.
그 노동으로 인해 b는 자신이 기록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경험이 ‘기록 당하는’ 사람이 되는 일을 겪었다. 경험이 ‘사례’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때 b는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한다.
“말하는 사람 입장에서 (기록을 허락한다는 건) 굉장히 배포가 커야 하는 일이구나.”
자신의 말이 일정 부분 훼손되거나 사라질 것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일부러 말을 없애진 않더라도, 나의 말이 전부 고스란히 상대에게 전해질 순 없다.
“내 이야기를 남의 입을 빌려 한다는 게 엄청 조바심이 나는 일이잖아요.”
b는 상대에게 자기 이야기를 하는 것을 “내 패를 보여주는” 일이라 했다. 나에 비해 현저히 적은 정보를 내놓는 사람에게 내 패를 대부분 드러내야 한다.
“내가 필요해서 만났어도 타인 앞에서 패를 깐다는 것은 두려운 일인데. 그게 남의 손을 빌려 기록된다고 할 때, 이걸 누가 보면 어떻게 하지? 어디까지 쓰는 것을 허용해야 하지? 그럼에도 기록을 허락한 건, 내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에게 빚을 갚는다는 느낌도 있고. 또 글은 저 사람의 노동 산물이기도 하니까. 나중에 글을 볼 때 이 부분을 엄청나게 고쳤으면 좋겠다는 말을 해도 될지. 여러 상황을 고려해서 계산하게 되더라고요.”
관계와 위치를 두고 하는 계산 끝에, 인터뷰이는 배포를 보인다. 그래, 괜찮아. 실은 자신을 다독이는 게다.
“내 이야기를 들어준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까 일정 부분 손해, 훼손을 감수하고. 그래 괜찮아. 그런 마음을 먹어야 하는 거죠.”
말하는 이(인터뷰이)는 배포를 보이고, 스스로를 다독이고, 계산을 한다. 그 맞은편에서 기록자(인터뷰어)는 자신을 책망하고(“말이 삶을 앞서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말로 그 삶을 전해 달라고 채근하는 나 자신을 책망하기도 한다.”) 기다리고(“침묵을 기다리는 것은 더 깊숙한 이야기를 꺼내라는, 인터뷰 진행자가 보내는 가장 강력한 격려이다.”) 스스로에게 되묻는다(“말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말을 하는 것이 정말 이들에게 더 나은 일인지 되묻는다.”) 그렇게 서로 애를 쓰며 말을 만든다.
서로 말을 건네고 언어를 찾아가는 일
사람들은 흔히 기록 노동(인터뷰)를 목소리 없는 이에게 목소리를 되찾아주는 행위라 여긴다. 기록되는 이(인터뷰이)는 말을 하고, 인터뷰어는 그 말을 해석해 세상에 내보일만한 유의미한 언어로 창조한다는 것이다. 빈약한 상상이다. 인터뷰어를 언어가 없는 자, 말할 수 없는 자로만 상정한다면, 아무 이야기도 듣지 못하게 된다. 들었다고 착각하는 자신만 남을 뿐이다.
기록자는 누구도 주지 않은 기록(인터뷰)의 권한을 스스로에게 부여하고 질문을 들고 만남의 자리로 간다. 시작이 그렇다고 해도, 인터뷰 과정에서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서로가 얽혀 애를 쓰는 과정 속에 말이 만들어진다는 것을. 나는 여기 ‘물으러’ 온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발달장애인과 소통을 하며 노동을 해온 b는 경험적으로 언어의 독립성과 고유성을 의문한다.
“언어 장애를 겪는 분들과 대화를 할 땐, 다 같이 공동으로 추측을 하며 대화에 참여하는 거예요. ‘못 알아들었어요. 다시 말해주면 안 돼요?’ 말이 전달 과정에서 다시금 만들어지는 거예요.”
그 말이 모자라서 채우는 것이 아니다. 언어는 원래 공동의 것이다. 고유하고 독립적인 언어(서사)를 지닌 사람은 없다. 언어는 기필코 영향받는다. 말은 무엇으로든 해석되고, 전달되고, 이어지고, 그리고 만들어지려 한다. 언어가 만들어질 준비가 되어있기에 우리는 말을 더듬어 간다. 사람 간의 언어는 늘 작동하고, 그 작동이 다른 무언가를(“사회가 요구하는 각본에 맞춰지지 않는 이야기”같은 것) 만들어 내리라 희망하면서 누군가에게 말을 건다.
인터뷰는 질문하고 답하는 작업이 아니다. 서로가 말을 건네는 일이다.
청중이 되는 일, 기록 노동
“어떻게 여성에게 이야기를 하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은 어떻게 우리가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까에 대한 질문과 맞물린다. 당사자의 시선으로 풀어내는 새로운 이야기는 청중에게 그 이야기를 듣는 법을 새롭게 배울 것을 요구한다.” <청중> 137쪽
말을 건네다 보면 인터뷰이/어는 서로에게 청중이 된다. c는 책에서 <청중>이라는 장을 집어 들었다. 세상은 c를 ‘당사자’라 부른다. 그에게 글쓰기는 “‘아니요’라고 말해도 되는지 가늠하는 자리”(95쪽)였다. 그러니까 그는 늘 청중을 염두에 둔 사람이었다.
“지지해주는 사람이 생기니까, 제 이야기를 할 용기가 생겼거든요. 그전까지는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거고, 이건 내가 끌어안고 가야 하는 나만의 문제겠거니 했는데. 그 이야기를 했을 때 받아주는 청중이 있다는 것이 고맙고 따뜻하고 든든한 일이어서.”
그래서 그는 글을 쓸 수 있었다. 우리는 그의 글 작업을 응원했는데, 그가 ‘당사자’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글이 세상의 확고한 말들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확고한 말들이 우리 앞에서 흔들렸다면, 침묵 앞에서 우리는 주어진 일을 해낸 것이다.”(99쪽)
c는 기록자를 이렇게 불렀다. “나를 들어주는 사람.”그래서 그이도 누군가의 청중이 되고 싶었다. 더 나아가 묻는다.
“우리가 어떻게 청중의 존재를 만들어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c의 청중이라고 생각했다. c의 말을 안다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이들이 눈물을 흘리던 자리에서, c는 울지 않았다. 우리는 몰랐지만 그는 이곳이 두어 시간 동안 “아니요”라고 말해도 되는 자리인지를 가늠하고 있었다. 몇 차례의 농담이 울지 않는 자신을 스쳐간 후, c는 말했다. 자신은 감정을 다스리는 약을 먹고 있고 그래서 지금 울 수 없다고. 슬픈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고.
c는 가끔 “약을 먹어서”로 시작하는 말을 했다. 그는 말을 했지만 나는 알아듣지 못했다. c는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의 감정을 더듬고, 이해하려 애쓰는 데 많은 에너지를 쓴다고 했다. 이 또한 자신에게는 노동이라고 했다. 그 노동은 성실했다.
당신의 말을 내가 들었다
나는 타인의 노동에 관해 듣길 원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c에게 들려주어서 고맙다고 했고, 듣지 않아서 미안하다고 했다. 그가 하는 노동은 기록의 자리에서 내가 하는 노동과 흡사했다. 더듬는 일, 이해해보려고 애쓰는 일, 그러기 위해 말을 건네는 일.
이날 우리는 서로의 노동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 밥을 떠다 먹여주는 노동은 아닐지라도 “끊임없이 말하고 끊임없이 들으면서 서로를 지켜”(202쪽) 내어 생존하게 하는 노동을. 그것은 당신의 말을 내가 듣는, 기록이라는 노동이다.
[필자 소개] 기록노동자 희정. 살아가고 싸우고 견뎌내는 일을 기록한다. 르포집 『노동자, 쓰러지다』, 『여기, 우리, 함께』, 『퀴어는 당신 옆에서 일하고 있다』 등을 썼다. 누군가의 말을 듣고 기록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고, 책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고, 그 책을 읽고 감상을 공적인 지면에 담을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있는 세상을 원하지 않는다. [기록을 읽다] 연재를 통해 기록 글(르포르타주, 구술 등)을 읽은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전하려 한다.
June 20, 2020 at 09:34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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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하는 여자들 '우리의 노동을 말하다' -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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